"삶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공간이며, 건물은 마지막이다. 반대 순서는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 얀 겔(Jan Gehl), 『사람을 위한 도시』Nikken Sekkei-Machida Station Area Community Hub “Hatmachida”차를 위해 넓힌 길마치다는 도쿄 서쪽에 붙은 통근 도시다. 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하라마치다 대로는 애초에 자동차를 위해 그어진 길이다. 차가 빠르게 흐를수록 걷는 사람의 자리는 얇아졌고, 도심을 오가던 발길은 머무를 데를 찾지 못한 채 흩어졌다.도시를 이루는 요소 가운데 도로만큼 단단하게 제도화된 것도 드물다. 폭과 경계와 용도가 법으로 묶여 있어 좀처럼 손대기 어렵다. 닛켄셋케이가 이 대로의 한 귀퉁이에 22.7제곱미터, 약 6.9평의 건축을 밀어 넣은 ..
"집이 참된 집이 되려면 작은 도시와 같아야 하고, 도시가 참된 도시가 되려면 큰 집과 같아야 한다." — 알도 판에이크(Aldo van Eyck)MVRDV Reveals Bihailou Art Village in Shenzhen as a Vertical Village Interpretation광장에 선 낱낱선전 사터우자오(沙頭角)는 홍콩과 맞닿은 동네다. 그 한복판에 MVRDV가 설계한 비하이러우 예술촌이 올라가고 있다. 문화 시설과 상업 시설, 공공 공간을 한자리에 묶은 복합 건물인데 아직은 공사 중이다.광장 건너편에서 올려다보면 이 건물은 좀처럼 한 채로 보이지 않는다. 색도 크기도 제각각인 덩어리가 층층이 얹혀 있는데, 그 틈마다 유리 난간을 두른 테라스가 끼어든다. 붉은 벽돌을 입힌 덩어리 하나..
"집이 진짜 집이 되려면 작은 도시를 닮아야 하고, 도시가 진짜 도시가 되려면 커다란 집을 닮아야 한다."알도 판 에이크(Aldo van Eyck) OMA-The Martin Residential Building From Wall to Balcony: Four Interlocking Volumes at The Martin암스테르담 동쪽, 38년 동안 담장이 둘렀던 교도소 부지가 약 1,350호의 주거지로 바뀌고 있다. OMA가 설계한 더 마틴은 그 한가운데 올라앉았다. 건물은 탑 하나로 곧게 서는 대신 크기가 다른 네 덩어리로 갈라져 서로 맞물리고, 네 면을 도는 발코니를 알루미늄 격자가 한 벌로 묶는다. 가두던 장치를 걷어 낸 자리에서 경계를 무엇이 대신하는가. 더 마틴은 그 답을 입면의 깊이에서 찾는..
"만들 수 없는 것은 결코 설계하지 마라." — 장 프루베(Jean Prouvé) Supra-Simplicities-MOM House골목이 끝나는 자리 대만 남부 가오슝, 좁은 골목은 집 한 채 앞에서 끝난다. 대지는 그 막다른 끝에 깊숙이 앉아 있다. 세 면을 이웃 주택과 학교가 바짝 둘러싸고, 드나드는 길은 하나뿐이다. 진입도 채광도 통풍도 그 통로 하나에 매달리니, 대지는 처음부터 여유가 없다. 도시 조직이 촘촘해질수록 이런 자리는 안으로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운동장이 건네준 여백 그런데 담 하나 너머는 학교 운동장이다. 붉은 트랙과 파란 농구 코트가 비워낸 자리만큼 시야가 훤히 트인다. 빽빽한 동네 한복판에서 좀처럼 얻기 어려운 숨통이어서, 설계는 이 여백을 대지가 지닌 가장 큰 자산으로 읽는다...
"미래의 건축가는 자연을 모방해 지을 것이다. 그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오래가며 경제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 안토니 가우디Sinuous form of Shenzhen Natural History Museum emulates "a piece of landscape" A Land Without Squares — Shenzhen Natural History Museum Buries Its Threshold in the Terrain도시의 끝에서 능선이 일어선다선전 핑산구의 조밀한 시가지가 옌쯔호 쪽으로 풀리는 자리에, 흰 능선 하나가 길게 누워 도시의 끝을 눌러 놓고 있다. 연면적 10만 제곱미터, 약 3만 250평에 이르는 덩치가 멀리서는 건물로 보이지 않아서, 윤곽 대신 낮게 부푼 땅의 등이 먼저 눈에..
"건축가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는다. 다만 현실을 변형한다." — 알바루 시자(Álvaro Siza)MVA Mikelić Vreš Arhitekti-Production and Office Building Dubrovčan폐기물이 쌓였던 자리자그레브 북서쪽에 두브로브찬이라는 마을이 있다. 낮은 능선과 밭이 이어지는 농촌 풍경이 마을을 감싸지만, 이 일대는 소규모 사업장과 산업 시설로 빠르게 바뀌는 중이다. 새 생산·업무 시설이 앉은 땅의 전신은 건설 폐기물 매립지다. 버려진 자리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라는 뜻이다.설계는 매립지를 정화하는 일에서 시작한다. 오염을 걷어낸 자리에 새로운 지형이, 곧 새로운 자연이 들어선다. 본래의 경사를 따라 쌓아 올린 세 개의 흙 언덕이 가운데 공간과 보행 동선을 한꺼번에 규정..
“선형적 시간은 서구의 발명이다. 시간은 선형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경이롭게 얽혀 있다.” — 리나 보 바르디(Lina Bo Bardi)Suite Arquitetos-Apartamento JLS대로의 속도를 등지고상파울루에서도 손꼽히게 붐비는 대로가 이 집 곁을 지난다. 자동차와 소음, 사람들의 움직임이 하루 종일 쉼 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스위트 아르키테토스는 도시의 속도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는다. 대신 그와 반대되는 시간을 집 안으로 들여놓는다. 오래되고, 무겁고, 쉽게 변하지 않는 돌과 나무의 시간이다.가공을 최소화한 표면은 재료가 지나온 시간을 고스란히 품는다. 이 집은 세월을 새기는 방식에서 도시보다 돌과 나무를 닮았다. 내부 공간 역시 벽과 문으로 명확하게 분절되기보다, 서로 다른 재료가 ..
"나는 사물을 보고 싶다. 내가 신뢰하는 것은 그것뿐이다. 보고 싶기에 나는 그린다."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 Luca Ricci Turns Optical Distortion into Atmospheric Furniture이미지를 다루던 손이 사물로 옮겨갈 때 밀라노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루카 리치(Luca Ricci)는 아트 디렉션과 브랜딩, 그래픽 디자인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어느 영역에서든 그의 태도는 한결같다. 실험을 마다하지 않고 세부를 놓치지 않는다. 최근 그가 내놓은 두 점의 가구는 이 이력을 그대로 옮겨 담았다. 기능을 묻는 질문과 이미지를 만들어온 사람의 직관이 같은 무게로 맞물린다. 하나는 소파 플리세 블록(Plissè Block)이다. 밀라노 남성복 브랜드 파이브포파..
"도시는 그 자체로 가장 뛰어난 집단 예술 작품이며, 건축은 그 도시의 본질이다." — 로헬리오 살모나(Rogelio Salmona) Plan:b arquitectos-23 Living비탈이 그려낸 도시 조직 메데인(Medellín)의 동쪽 산비탈에 프로벤사(Provenza) 지구가 걸터앉아 있다. 이곳의 도시 격자는 반듯하지 않다. 가파른 지형이 길의 방향을 여러 차례 비틀어 놓은 탓이다. 플랜:비 아르키텍토스(Plan:b arquitectos)에게 주어진 대지 역시 길고 좁다. 경사도 만만치 않다. 건축가는 이 조건을 걸림돌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비탈을 핑계 삼아 동네에 무언가를 되돌려줄 기회로 읽었다. 블록을 가로지르는 공공 계단길 건축가는 건물 남쪽에 계단으로 된 공공 통로를 냈다. 이 길은 블..
"메인 스트리트는 거의 옳다." —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 ULTRA STUDIO-Apartment in Uehara균질한 혼돈, 도쿄 도쿄의 거리는 통일감이 없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그리고 똑같은 이유로 예찬받는다. 필지마다 제멋대로인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탓이다. 사람들은 이 무질서를 도시의 성격이라 부른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전체를 보면 풍경은 뜻밖에 균질하다. 흰색과 회색, 베이지와 갈색이 끝없이 이어질 뿐 뚜렷한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베이지 타일을 붙인 콘크리트는 도쿄 아파트의 표준 외피로 자리 잡았다. 기원은 여전히 흐릿하다. 그럼에도 이 풍경은 늘 거기 있었던 "자연"처럼 느껴진다. 야생의 자유와 진부함이 공존하는 이 풍경을 다시 평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