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다시 살려낼 때에야 우리는 과거와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스베레 펜(Sverre Fehn)COOKFOX-Bruce Springsteen Center for American Music공간의 건축, 시간의 음악건축은 자리를 차지하고 음악은 시간 속을 흐르므로, 둘은 애초에 셈법이 다르다. 흘러가는 예술을 어떻게 한자리에 붙박아 둘 것인가. 쿡폭스는 이 물음을 설계의 첫 조건으로 삼았다. 형태를 다듬는 대신 재료와 경험 쪽에서 답을 찾았으니, 다 지은 순간보다 앞으로 변해 갈 시간이 건물의 주제가 된다. 내후성강판에 번지는 녹, 목재에 남은 성장의 자국, 입면을 훑고 지나가는 볕이 저마다 시간을 실어 나른다.초지를 가로지르는 널판 길뉴저지주 롱브랜치의 몬머스대학교 캠퍼스에서 방문객은 건물보다 초지..
"건축은 가장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봉사다. 쓸모를 낳는 예술이다."— 렌초 피아노(Renzo Piano)OYO Architects perches steel-framed office on harbourside warehouse. The Raised Deck — Splitting Warehouse and Office to Win Back the Port항만이 먼저 내미는 얼굴오스텐더 항 부두를 따라 걸으면 컨테이너와 폐기물 수거함, 노란 갠트리 크레인이 시야를 가득 메운다. 잡다한 앞마당 너머로 회색 콘크리트 벽이 나직이 뻗어 있다. 벽 위에는 붉은 강철 상자가 세 개 층을 포갠 채 떠 있는데, 벽의 끝선을 훌쩍 넘겨 허공으로 몸을 내민다. 그 무게를 가느다란 붉은 기둥 하나가 받아 창고 지붕까지 내려온..
"다 풀고 났을 때 그 해답이 아름답지 않다면, 나는 그것이 틀렸음을 안다." — 리처드 버크민스터 풀러 Carried by Scales, Emptied Within언덕 위에서 세 갈래로 벌어지다 청두 외곽, 나직한 구릉이 겹겹이 이어지는 자리에 은빛 덩어리 하나가 올라앉아 있다. 새로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 전시관과 곁의 전망탑이 한 쌍으로 눈에 들어온다. 두 건물은 쓰촨성에 들어설 신도시를 미리 알리는 표지다. 청두 미래과학기술도시(Chengdu Future Science and Technology City)라 부른다. 도시는 아직 공사 중이어서, 방문객은 완성된 거리 대신 이곳에서 앞으로 올 풍경을 먼저 만난다. 평면은 삼각형 바람개비를 닮았다. 세 갈래로 뻗은 전시홀은 저마다 다른 쪽으로..
"삶이 먼저이고, 그다음이 공간이며, 건물은 마지막이다. 반대 순서는 결코 작동하지 않는다." 얀 겔(Jan Gehl), 『사람을 위한 도시』Nikken Sekkei-Machida Station Area Community Hub “Hatmachida”차를 위해 넓힌 길마치다는 도쿄 서쪽에 붙은 통근 도시다. 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하라마치다 대로는 애초에 자동차를 위해 그어진 길이다. 차가 빠르게 흐를수록 걷는 사람의 자리는 얇아졌고, 도심을 오가던 발길은 머무를 데를 찾지 못한 채 흩어졌다.도시를 이루는 요소 가운데 도로만큼 단단하게 제도화된 것도 드물다. 폭과 경계와 용도가 법으로 묶여 있어 좀처럼 손대기 어렵다. 닛켄셋케이가 이 대로의 한 귀퉁이에 22.7제곱미터, 약 6.9평의 건축을 밀어 넣은 ..
"집이 진짜 집이 되려면 작은 도시를 닮아야 하고, 도시가 진짜 도시가 되려면 커다란 집을 닮아야 한다."알도 판 에이크(Aldo van Eyck) OMA-The Martin Residential Building From Wall to Balcony: Four Interlocking Volumes at The Martin암스테르담 동쪽, 38년 동안 담장이 둘렀던 교도소 부지가 약 1,350호의 주거지로 바뀌고 있다. OMA가 설계한 더 마틴은 그 한가운데 올라앉았다. 건물은 탑 하나로 곧게 서는 대신 크기가 다른 네 덩어리로 갈라져 서로 맞물리고, 네 면을 도는 발코니를 알루미늄 격자가 한 벌로 묶는다. 가두던 장치를 걷어 낸 자리에서 경계를 무엇이 대신하는가. 더 마틴은 그 답을 입면의 깊이에서 찾는..
"만들 수 없는 것은 결코 설계하지 마라." — 장 프루베(Jean Prouvé) Supra-Simplicities-MOM House골목이 끝나는 자리 대만 남부 가오슝, 좁은 골목은 집 한 채 앞에서 끝난다. 대지는 그 막다른 끝에 깊숙이 앉아 있다. 세 면을 이웃 주택과 학교가 바짝 둘러싸고, 드나드는 길은 하나뿐이다. 진입도 채광도 통풍도 그 통로 하나에 매달리니, 대지는 처음부터 여유가 없다. 도시 조직이 촘촘해질수록 이런 자리는 안으로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운동장이 건네준 여백 그런데 담 하나 너머는 학교 운동장이다. 붉은 트랙과 파란 농구 코트가 비워낸 자리만큼 시야가 훤히 트인다. 빽빽한 동네 한복판에서 좀처럼 얻기 어려운 숨통이어서, 설계는 이 여백을 대지가 지닌 가장 큰 자산으로 읽는다...
"건축은 빛 속에 모인 매스들이 펼치는 능숙하고 정확하며 장엄한 유희다." —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Wittfoht Architekten-Neckarbogen Neighborhood Parking Garage도시의 모서리에서 일렁이는 빛 하일브론(Heilbronn)의 새 도시 구역 네카어보겐(Neckarbogen)을 걷다 보면, 거리 끝에서 한 덩어리의 은빛 건물이 빛을 따라 천천히 일렁이는 장면과 마주한다. 절곡한 타공 금속 패널이 저마다 다른 깊이로 접히며 표면을 덮고, 그 위로 햇빛이 미끄러질 때마다 건물은 수면 위로 번지는 잔물결처럼 살아 움직인다. 멀리서 보면 가볍고 투명한 막 같지만, 가까이 다가설수록 손끝으로 만져질 듯 또렷한 입체의 질감이 드러난다. 도시의 새 구역에 강렬..
"나는 감정의 건축을 믿는다. 건축이 그 아름다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 루이스 바라간 gh3*-O-day'min Park Pavilion주차장이 공원이 되기까지 에드먼턴 도심, 빠르게 변모하는 웨어하우스 캠퍼스 지구에 새로운 공공의 자리가 열렸다. 한때 아스팔트로 뒤덮인 노상 주차장이던 땅이 활기를 머금은 오데이민 공원으로 바뀐 것이다. 에드먼턴시가 의뢰한 이 공원은 낮은 밀도의 산업 부지를 밀도 높은 복합 주거 커뮤니티로 이끄는 전환의 촉매가 된다. 공원과 그 안의 파빌리온은 도심 생활을 떠받치고 지역의 정체성을 세우려는, 눈에 잘 띄는 초기 공공 투자다. 동시에 새로운 공공 영역이 어떤 수준이어야 하는지를 도시에 처음으로 내보이는 선언이기도 하다. 붉은 볼트, 공원..
"집은 언덕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언덕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집과 언덕이 함께 살 때, 비로소 둘 다 더 행복해진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Frank Lloyd Wright) Off-Grid and Fire-Ready: A Corten-Clad House in the California Mountains by Faulkner Architects불의 기억과 재건의 의지 2019년 킨케이드(Kincade) 산불이 캘리포니아 힐즈버그(Healdsburg) 북동쪽 마야카마스 산맥(Mayacamas Mountains)의 외딴 대지를 휩쓸었을 때, 그 자리에 서 있던 자립형 주택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거주자들은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단, 자신들의 방식으로. 샌프란시스코(San Franc..
"태양은 건물 측면을 비추기 전까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지 못했다."— 루이스 칸 (Louis Kahn) OOIIO Arquitectura-Leganés Auto Center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는 건축 마드리드 광역권의 위성도시 레가네스. 자동차 산업에 특화된 이 공업단지를 처음 걷는 사람이라면, 주변 건물들이 얼마나 무표정한지 금세 알아챈다. 예외 없이 기능만 남겨진 외피들, 빛도 재료도 감정도 없는 건물들이 줄지어 선 이 풍경 속에서, OOIIO 아르키텍투라가 설계한 레가네스 오토 센터는 단번에 눈을 사로잡는다. 흰색 슬래트가 민트그린 구조체 위에서 리듬을 만들며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그 뒤로 반짝이는 산업용 덕트가 파사드의 일부인 양 당당하게 솟아 있다. 자동차 판매·수리 센터가 이렇게..